5·18 민주항쟁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마주한 시인들의 목소리를 통해, 광주의 슬픔과 결의,
그리고 그날의 진실을 담아낸 시들을 소개한다.
절망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민중의 의지를 시를 통해 되새기고자 한다.
김준태 – 시집 《아아 광주여, 우리 나라의 십자가여》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첫번째 작품으로, 전남매일신문에 실렸다. 최초 개제 당시, 군부의 검열로 총 109행 중 겨우 33행만 실렸다. 해당 33행을 소개한다.
- 아아 광주여, 우리 나라의 십자가여 -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아아, 우리들의 도시 우리들의 노래와 꿈과 사랑이 때로는 파도처럼 밀리고 아아,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구나 셋방살이 신세였지만 얼마나 우린 행복했어요 난 당신에게 잘해주고 싶었어요 아아, 여보! 나는 또 당신의 전부를 당신의 젊은 당신의 사랑 당신의 아들 당신의 아아, 여보!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지금 우리들은 더욱 튼튼하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아아, 지금 우리들은 어깨와 어깨 뼈와 뼈를 맞대고 이 나라의 무등산을 오르는구나 아아, 미치도록 푸르른 하늘을 올라 해와 달을 입맞추는구나 광주여 무등산이여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젊어져갈 청춘의 도시여 지금 우리들은 확실히 굳게 뭉쳐있다 확실히 굳게 손잡고 일어선다
문병란 – 시집 《아직은 슬퍼할 때가 아니다》 1985년
문병란은 1935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평생을 민중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시로 증언한 참여 시인이자 교육자다. 1980년대 광주민주화운동의 참혹한 진실을 시로 담아내며, 민중의 분노와 저항을 절제된 언어 속에 뜨겁게 새겨냈다. 대표작 〈광주여 무등을 떠나지 마라〉를 비롯한 그의 시편들은 억압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시인이자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끝까지 실천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 직녀에게 -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단 하나 오작교마저 끊어져버린 지금은 가슴과 가슴으로 노둣돌을 놓아 면도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그대 몇번이고 감고 푼 실을 밤마다 그리움 수놓아 짠 베 다시 풀어야 했는가. 내가 먹인 암소는 몇번이고 새끼를 쳤는데, 그대 짠 베는 몇필이나 쌓였는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사방이 막혀버린 죽음의 땅에 서서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유방도 빼앗기고 처녀막도 빼앗기고 마지막 머리털까지 빼앗길지라도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 우리들은 은하수를 건너야 한다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을 딛고 건너가 다시 만나야 할 우리 칼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이별은 이별은 끝나야 한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을 노둣돌 놓아 슬픔은 슬픔은 끝나야 한다, 연인아.
김남주 – 시집 《조국은 하나다》 1988년
김남주는 1980년대 군부 독재 정권과 그에 맞선 민주화 투쟁의 중심에서 저항의 목소리를 시로 담아낸 대표적인 민중 시인이다. 그는 수차례 투옥되면서도 펜을 놓지 않았고, ‘민중의 시인’으로 불리며 시대의 고통을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그의 시집 《진혼가》와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억압과 폭력에 맞선 민중의 분노와 희망을 강렬한 언어로 표현하며, 한국 현대사의 비극 속에서 인간 존엄과 자유를 외쳤다.
-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
오월은 바람처럼 그렇게 서정적으로 오지도 않았고 오월은 풀잎처럼 그렇게 서정적으로 눕지도 않았다 오월은 왔다 피묻은 야수의 발톱과 함께 오월은 왔다 피에 주린 미친개의 이빨과 함께 오월은 왔다 아이 밴 어머니의 배를 가르는 대검의 병사와 함께 오월은 왔다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들의 눈동자를 파먹고 오월은 왔다 자유의 숨통을 깔아뭉개는 미제 탱크와 함께 왔다 노래하지 말아라 오월을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은 바람처럼 그렇게 서정적으로 오지도 않았고 오월은 풀잎처럼 그렇게 서정적으로 눕지도 않았다 오월은 일어섰다 분노한 사자의 울부짖음과 함께 오월은 일어섰다 살해된 처녀의 피묻은 머리카락과 함께 오월은 일어섰다 파괴된 인간이 내지르는 최후의 절규와 함께 그것은 총칼의 숲에 뛰어든 자유의 육탄이었다 그것은 불에 달군 철공소의 망치였고 그것은 식당에서 뛰쳐나온 뽀이들의 식칼이었고 그것은 술집의 아가씨들의 순결의 입술로 뭉친 주먹밥이었고 그것은 불의의 대상을 향한 인간의 모든 감정이 사랑으로 응어리져 증오로 터진 다이너마이트의 폭발이었다 노래하지 말아라 오월을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바람은 야수의 발톱에는 어울리지 않는 시의 어법이다 노래하지 말아라 오월을 바람에 일어서는 풀잎으로 풀잎은 학살에 저항하는 피의 전투에는 어울리지 않는 시의 어법이다 피의 학살과 무기의 저항 그 사이에는 서정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자격도 없다 적어도 적어도 광주 1980년 오월의 거리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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