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 속에서
민족의 아픔과 저항의 목소리를 담아낸 우리나라 저항시들을 소개한다.
강압과 검열, 탄압이 일상이었던 시대에도
시인들은 조국의 자유와 민족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펜을 들었고,
그들의 시는 침묵을 강요받던 민중의 분노와 희망을 대신 말해주었다
한용운 – 시집 《님의 침묵》 1926년
한용운은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존엄을 시로 노래한 대표적인 저항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다. 슬픔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저항의지를 절제된 언어로 담아냈으며, 그의 시는 억압의 시대에 조용하지만 강한 목소리로 민족의 혼을 지켜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 당신을 보았습니다 -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 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이 없는 자는 인권(人權)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貞操)냐"하고 능욕하려는 장군(將軍)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激憤)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刹那)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이상화 – 시집 《개벽(開闢)6월호》 1926년
이상화는 일제강점기 식민지 현실에 맞서 조국의 상실과 민족의 고통을 시로 표현한 대표적인 저항 시인이다. 그는 감상적 애국주의를 넘어,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바탕으로 조국의 운명과 민족적 정체성을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의 시 세계는 아름다운 언어 속에 민족의 아픔과 저항의식을 동시에 담아내며, 일제의 폭력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정신을 문학으로 증언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육사 – 시집 《문장(文章)》 1939년
이육사(1904–1944)는 일제강점기 민족의 고통과 독립의 염원을 시로 승화한 대표적인 저항 시인이다. 그의 대표작인 시 〈청포도〉는 1939년 발표되었으며,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민족의 정신과 독립의 의지를 담고 있다. 이 시는 '청포도'를 통해 민족의 순수성과 희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며, 일제강점기 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육사는 또한 독립운동가로서 3·1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민족의 독립과 정신적 자각을 위해 힘썼다. 그의 문학과 사상은 일제강점기 민족문학의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받고 있다.
- 청포도 -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려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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